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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영화리뷰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





















바흐만 고바디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2004)>





인생이란 놈은 나를 산과 계곡으로 떠돌게 하고 나이 들게 하면서 저승으로 이끄네

    
이는 아이들이 이라크에서 선물포장과 짐 나르는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부르는 노래의 가사이다.

춥고 배고픈 땅, 곡물은커녕 지뢰 천지인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그 땅이 바로 아이들의 터전이다. 부모를 잃은 아이들은 졸지에 가장이 되었다. 그들의 삶의 목표는 돈을 벌어 식구들을 먹여 살리는 것이다. 노동의 대가로 받은 돈은 식구들의 밥이 되고, 치료비가 되고, 동생의 공책이 된다. 어린 가장들은 너무 일찍 인생을 경험했다. 그들에게 인생이라는 놈은 그들을 끊임없이 떠돌게 하는 것이자, 그 떠돎이 너무 고단해 나이가 먹어가는 줄도 모르게 하는 것이며, 그들의 생을 허무하고 헛헛하게 마감하게 하는 가혹한 존재이다.




     이라크로 가는 길은 험하디 험하다. 사람들은 말에게 술을 먹인다. 순식간에 온 몸으로 퍼지는 벌건 온기와 알딸딸함이 말로 하여금 살을 에는 듯한 추위와 등을 짓누르는 무게를 잊게 해주기 때문이다. 말들조차 맨 정신으로 오갈 수 없는 길을 아이들은 어떻게 왕래하는 것일까? 아이들에게 의 역할을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아버지께서 돌아가시자 아윱은 5남매의 가장이 되었다. 큰 누이 로진, 15살이지만 정신적으로나 외형적으로나 세 살 박이 꼬맹이로 밖에 보이지 않는 마디, 마디를 돌보는 어른스러운 넷째 아마네,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막내가 그의 어깨 위에 앉아있다. 그 삶의 짐이 버거울 텐데 아윱은 단 한번도 자신의 처지에 대해 불평하지 않는다. 그에게 마지막 남은 희망이 바로 가족이기 때문이다. 되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것도 없는, 아니 그런 것이 있어도 할 수 없는 척박한 땅에서 그에게 목표나 희망이 될 수 있는 것은 가족밖에 없었다. 그는 가족을 위해서 이라크로 향했다. 자신은 학교에 다니지 못하더라도 아마네를 학교에 보내고 싶어했고, 자신의 몸이 축나더라도 마디의 병을 고쳐주고 싶어했다. 그러한 아윱의 가족애가 그의 몸에 온기를 불어넣었다. 뿐만 아니다. 아픈 동생을 위해 시집을 가겠다는 로진의 마음, 먼 길을 떠나는 오빠에게 빵을 건네는 아마네의 마음, 아윱을 바라보고 있는 네 쌍의 간절한 눈들이 아윱을 취하게 하고 그의 고통을 잊게 했다.





     이렇게 아이들은 가혹한 인생 속에서도 자신의 처지를 감내하며 씩씩하게 살아가려 노력한다. 그러나 인생이란 놈은 아이들을 가만히 두지 않는다. 인생은 끝없이 그들을 험준한 산과 계곡으로 내몬다. 삯을 받지 못했고, 로진은 마디를 수술시켜주지 못했으며, 아윱은 매복한 이라크군인들을 피하다 이리저리 나뒹굴어졌다. 가파른 산 중턱에서 쓰러진 말처럼 아이들도 가혹한 인생에 한 가운데에서 힘을 잃어간다.




     아윱은 마지막 힘을 다해 국경을 넘는다. 아윱과 노새와 마디가 지나간 자리, 노새의 담요만이 철조망에 걸려 있다. 앞으로 아윱의 삶은 어떻게 될까? 무사히 집에 돌아올 수 있을까? 마디를 수술시키면 그는 과연 행복해질까? 결국 인생이라는 놈의 계획대로 산과 계곡을 떠돌다 세상을 마감하지 않을까? 담요가 떨어진 것은 어쩌면 앞으로도 그의 삶이 담요 없는 추운 겨울 같을 것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허무함과 헛헛함
, 안쓰러움과 답답함이 밀려왔다. 영화는 청각적 요소들을 이용하여 이러한 감정들을 극대화한다. 배경음악을 쓰지 않고, 한적하다 못해 적막한 마을의 소리를 그대로 오디오 안에 집어넣는다. 바람소리, 멀리서 들려오는 가축들의 소리, 사람들의 말소리, 눈을 밟는 소리가 조용한 가운데 간간히 들려오며 쓸쓸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세련된 기법은 찾아볼 수 없었지만 아이들의 삶을 그대로 담은 듯한, 인위적이지 않은 다큐멘터리적 시선은 지금도 어딘가에서 살고 있을 것만 같은 아윱남매의 존재에 더욱 생명을 불어넣는 듯 했다.               
                                                                                                                             2009년 가을. 강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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