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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독일 초등학교(Grundschule) 반장 선거와 딸아이의 스트레스

지난주 수요일, 성 마틴 제등 축제에 참석하고 집에 돌아와 간단히 저녁을 먹었다. 

식사 후 씻고 잘 준비를 마친 아이는 만화영화를 보고 싶다고 했다.

아이의 성화에 짧은 에피소드 하나만 보고 침대에 눕기로 약속을 한 후 만화영화를 틀어주었다.

만화영화를 보고나서 아이는 하나만 더 보고 싶다며 짜증을 냈고 나는 아이를 혼냈다.

"8시도 지났고, 이제 잘 시간이야. 하나만 보기로 약속했잖아. 내일 학교에 가야 하니까 빨리 자야 피곤하지 않아. 그리고 왜 짜증을 내니.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는 속담 Julia도 알잖아. 네가 그렇게 짜증 내며 이야기하면 엄마도 부드럽게 이야기하기 힘들어."

아이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방으로 들어갔는데 5분 정도 지났을까? 거실에 있던 아빠에게 쪽지를 건네주고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엄마 아빠, 짜증내서 미안해요. 그러면 안되는데 요즘 저도 스트레스가 많아서 그래요. 엄마 아빠 걱정할까봐 말 못 했어요. 말 못 해서 미안해요. 그런데 저도 힘들어요.'

정말 많이 놀랐다. 이런 내용의 편지를 받은 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보통은 '엄마아빠 사랑해요/ 고마워요/ 이것 좀 보세요 제가 그렸어요' 이런 편지만 써주었는데. 스트레스가 많다니, 힘들다니 도대체 무슨 일이지?

다급히 아이를 불러 어떤 부분이 힘든지, 무엇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지 물어보았다. 아이는 품에 안겨 애써 담담하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오늘 학교에서 반장선거가 있었어. 나도 반장을 잘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손을 들었어. 그런데 사실 친구들이 나를 많이 뽑아주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은 하고 있었어. 남자아이들은 내가 옆에만 가도 붸 이러잖아. 반장을 먼저 뽑고 그다음에 부반장을 뽑는데 나는 처음에 내가 나를 적을 수 있는지 몰랐어. 그랬는데 1표밖에 못 받았어. 두 번째엔 나도 나를 적었는데 2표 나왔어. 내 친구 Audry는 내가 너무 하고 싶다고 하니까 날 뽑아준 거야. 만약에 Audry가 날 안 뽑아줬으면 나는 한 표도 못 받았어. 친구들이 나를 안 뽑아줬어..."

마지막 말을 뱉으며 아이는 엉엉 울었다. 안쓰럽고 또 안쓰러웠다.

아이가 학교에서 친구들이 없는 편도 아니고 씩씩하게 학교 생활을 잘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아직 2학년인 데다 외국인인 Julia를 아이들이 반장으로 뽑아주진 않겠지. 아직 독일어도 부족할 텐데.

아이 학교에 아시아인은 5명 정도다. 아이를 제외하곤 전부 중국 친구들이라 Julia가 학교에서 유일한 한국인이다. 입학한 지 1년이 넘었지만 어떤 아이들은 아직까지도 Julia에게 중국 사람이냐고 물어본다고. 사실 물어보는 게 아니라 놀리는 쪽에 가깝다. Julia 말로는 그중 한 아이에겐 백 번 넘게 한국인이라고 말했지만 계속 같은 질문을 반복하다고 한다.

우는 아이를 꼬옥 안고 속상한 마음을 추스르는데 남편이 입을 열었다.

"정말 속상했겠다. 당연히 속상하지. 아빠도 초등학교 때 반장선거 나가서 떨어진 적 있었는데 정말 속상했었어. 그런데 Julia! 아빠가 네 말을 듣고 가장 먼저 해주고 싶은 얘기는 네가 정말 대단하다는 거야. 어떻게 반장선거에 나갈 생각을 했어? 아빠였으면 독일에서 반장선거 나갈 생각 못했을 것 같아. 아마 한국에 계시는 가족들도 다들 놀라실걸? Julia가 그렇게 용기 있는 아이냐고 놀라실 거야. 친구들이 많이 뽑아주지 않은 건 아마도 네가 아직 2학년이니까(이 학교는 반에 1학년-4학년이 함께 있음) 그럴 거야. 그리고 너도 어렴풋이 알겠지만 Julia는 다른 친구들과 좀 다르잖아. 한국인이고. 친구들이 아직 어려서 다른 나라에서 온 친구가 아직 낯설 수 있어. 그건 아직 뭘 잘 몰라서 그런 거야. Julia가 잘못한 게 있어서, Julia가 싫어서 그런 게 아니야. 그러니까 너무 속상해하지 말자. 아빠는 Julia가 너무 자랑스러워. 정말 대단해 우리 딸."

정말 용기 있고 대단한 행동이었다고 칭찬해주니 아이는 다행히도 금세 어깨가 으쓱해졌다. 그 와중에 자신이 2학년이지만 반장을 충분히 할 수 있다고 자신 있게 이야기하는 것을 보니 마음이 놓였다. 그리고 힘든 일이 있으면 엄마 아빠에게 꼭 이야기해 달라고, 이야기를 해주지 않는 게 엄마 아빠에겐 더 큰 걱정이라고 아이에게 말해주었다. 한참 안겨있던 아이는 한층 나아진 기분으로 방으로 돌아갔다. 

"엄마 아빠! 나 힘든 일 있으면 꼭 이야기할게. 꼭!!! 잘 자. 사랑해. 좋은 꿈 꿔. 꿈에서 만나!"

아이가 잠자리에 들고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아이가 대견했다. 독일 학교 생활에 적응은 잘하고 있는지 늘 걱정인데 반장선거에 나가다니. 독일어도 공부도 친구관계도 여러모로 힘들 텐데. 위축될 만도 한데... 정말 엄마보다 훨씬 나은 딸이다. 

'정말 멋있어. 잘했어. 자랑스러운 우리 딸. 사랑해.'

성 마틴 제등 축제에 참석하기 위해 학교로 가는 길 (06.11.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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