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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책 리뷰

둘이 함께 살아간다는 것

 

30대, 초등학생 딸을 둔 기혼 여성.

스물넷에 결혼을 했고 스물여섯에 엄마가 된 나의 삶과 전혀 다른 삶을 엿보고 싶었다.

그들의 삶은 참 달랐고, 한 편으론 또 비슷했다.

책을 읽는 내내 나와 전혀 다른 세계의 사람들의 삶을 엿보는 게 아니라

멋지게 인생을 살아내고 있는 선배 언니들의 이야기를 담백하게 듣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담백하다는 건, 꼰대 같지 않다는 말이다.

 

취향이 잘 맞는 싱글 여성 둘이

한강변에 30평대 아파트에서

고양이 네 마리와 함께 산다.

 

정리정돈을 잘하는 사람과 요리를 잘하는 사람이 가사를 분담하고,

물건을 쌓아두는 사람과 최소한의 물건으로 생활하는 사람이 각자의 라이프 스타일을 받아들이는.

두 사람의 이야기.

 

서로 다른 삶을 살아온 두 사람이 맞춰가며 살아간다는 점에서 두 사람의 삶은 결혼생활과 닮은 점이 참 많다.

특히 싸움의 부분에서.

 

게다가 우리는 싸우는 방식 때문에 더 싸웠다. 나는 모로 피해 얼음 벽을 치는 사람이고, 김하나는 정면으로 불화살을 쏘아대는 사람이다. 태풍이 불어오기 시작할 때 내 방으로 대피해 숨어 있으면 김하나는 문을 벌컥 열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고도 잠이 와?" 사실 졸린 참이었다. 이럴 때 한숨 자고 일어나면 좀 나아지는데...

 

빨래를 빨리 개키지 않아서,

여행 전날 늦게 들어와서,

싸움은 대부분 사소한 문제에서 비롯된다. 

이러한 사소한 문제들은 싸우는 방식의 차이로 인해 폭발하기 마련이다. 그날도 아주 사소한 문제로 남편과 다퉜다. 왜 싸웠는지 생각이 나질 않는 걸 보니 별일 아니었던 모양이다. 싸우고 난 후 쉬익쉬익대며 서재 문을 쾅 닫고 나왔는데, 한참이 지나도 분이 풀리지 않는 거다. 그래서 다시 문을 쾅 열고 들어갔는데, 남편은 노트북으로 백분토론을 보고 있었다. "그러고도 백분토론이 보고 싶어?" 

 

내가 이제야 배운 싸움의 기술은 이런 것이다. 진심을 담아 빠르게 사과하기,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내 입으로 확인해서 정확하게 말하기, 상대방의 기분을 헤아려 어떨지 언급하고 공감하기, 누군가와 같이 살아보는 경험을 거치고서야 이런 기본적인 것들을 배울 수 있었다. 부부싸움뿐 아니라 같이 사는 친구끼리의 싸움도 꼭 칼로 물베기 같다.

 

이 기술은 11년째 남편과 동거하며 익힌 싸움의 기술과 거의 일치한다. 11년을 같이 살았어도 조심할 건 조심해야 한다. 여기서 조심이란 건 상대방의 기분을 헤아리는 것. 싸우고 나서 상대방의 기분을 헤아려 어떨지 언급하고 공감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싸우기 전에도, 평소에도 늘 상대방의 기분을 헤아려야 한다. 이 사람이 어떤 부분에서 화가 나고 어떤 부분에서 기분이 상하는지 알기 때문에 더 조심스러워지고 그 사람이 더욱 어려워지는 면이 있다. 그 사람을 다 안다고 생각하고 너무 편하게 대할 때 문제가 생긴다.

 

매일 리스트에 올릴 음악을 한 곡씩 선정해서 더할 때마다 언젠가 부산 또는 어딘가의 바닷가에 생길 흥 나는 술집을 떠올려본다. 서울의 일상에 한 곡 분량 정도의 바다가 끼어든다. 미래를 구체적으로 그려볼 때마다 그 미래에 한 걸음씩 다가가는 것이라고 하지 않던가. 어찌 보면 이것도 우리의 노후 계획이다.

 

이 책에서 가장 좋았던 부분은 역시 '하와이 딜리버리'다. 정말 범상치 않은 노후계획이다. 술과 친구들과의 술자리를 좋아하는, 술맛을 돋운다고 느끼는 음악의 결이 비슷한 두 사람이 바닷가의 한 술집에서 지금까지 매일매일 모아둔 술맛 나는 플레이리스트를 틀며 늙어가는 노후라... 하루하루 하와이 딜리버리 계정에 소개할 음악을 고를 때마다 떠오르는 미래의 한 장면. 그 이미지만으로도 하루를 신나게 보낼 수 있을 것만 같다. 

어르신들은 말씀하신다. 

"결혼 안 하고 외로워서 어떻게 살려고 그래? 남편도 있고 자식도 있어야 외롭지 않게 늙어가지." 

언니들의 노후계획을 들으니, 왜 꼭 남편도 있고 자식도 있어야 하나 싶다. 난 남편도 있고 자식도 있지만 언니들의 노후계획을 응원한다. 이제 하와이 딜리버리 트위터 계정을 팔로잉 하려고 한다.(@hawaii_delivery) 언젠가 바닷가 술집에 들러 술 한잔 할 때 듣게 될 노래들을 미리 들어보고 싶어서...

 

몸과 마음에 기운이 필요할 때는 스스로를 잘 먹여야 한다는 깨달음, 혼자 당당하게 고깃집에 들어가 2인분을 구워 먹을 수 있는 경험치, 작은 실패를 삼키고 내려보내는 소화력 같은 것 말이다.

 

이 책의 두 사람은 참 단단한 사람들이다. 몸과 마음에 기운이 필요할 때 스스로를 잘 먹일 줄 알고, 혼자 당당하게 고기 2인분을 구워 먹을 수 있는 경험치가 있으며 작은 실패를 삼키고 내려보내는 소화력이 있는 사람들이다. 운동으로 삶을 살아갈 체력을 키우고 친구들과의 술자리로 하루의 스트레스를 떠내려 보내며 자신의 삶을 책임지는 어른들. 혼자의 삶을 오롯이 살아낼 힘이 있는 사람 둘이 모여 더 단단한 조립식 가족을 만들었다. 자신의 삶을 책임질 수 없는 사람은 타인과 함께 살 수 없다. 그런 사람은 타인의 삶 또한 서서히 갉아먹는다. 동거인이 남자든 여자든, 사랑하는 관계든 친구 관계든 결국은 똑같다. 혼자 잘 살 수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과도 함께 잘 살 수 있다.

 

비슷한 점이 사람을 서로 끌어당긴다면, 다른 점은 둘 사이의 빈 곳을 채워준다. 나와 똑같은 사람이 존재한다면 과연 함께 살기 좋은 대상이었을까? 아마 가슴속 깊이 이해하면서 진절머리를 내고 도망쳤을 것 같다. 참 다른 김하나와 함께 살면서 나는 조금은 욕심이 줄고, 얼마간 정돈되었고, 약간은 느긋해졌다(고 믿고 싶다). 이렇게나 다른 나와 같이 살아서 다행이라고 느끼는 순간이, 내게 그렇듯이 김하나에게도 때때로 찾아오면 기쁘겠다.

 

취향도 성향도 서로 잘 맞는 게 아주 많다고 해도 결국은 남이다. 다른 사람이다. 관건은 다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태도다. 함께하는 삶이라는 건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작은 여백들을 둘이 같이 채워가는 일이다.

싱글 여성 둘이 함께 사는 모습은 나와 많이 다를 것이라 생각했다. 싱글들을 위한 책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뒤늦게 책장을 열어보았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결국 사람 사는 이야기는 거기서 거기였다. 새로운 가족의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신선했지만, 결국 두 사람이 함께 사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공감이 갔다는 말이다. 둘이 함께 잘살아 보고 싶다면 이 책을 읽어보길 추천한다. 남편에게도 한번 읽어보라고 건네줄 예정이다.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를 보면서 느낀 건 역설적이게도 '혼자도 잘 살 수 있는', 동거인에게 긍정적인 에너지를 나눠줄 수 있는 건강한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것이다. 

 

집 안에 존경할 만한 사람이 사는 건 잔소리쟁이가 사는 것보다 천배는 동기 부여가 된다. 그렇게 동거인 눈치가 보여 꾸역꾸역 뭔가를 하더라도 결과는 모두 내 것으로 쌓인다. 더 나아진 체력, 더 많은 성과가 나에게 더 큰 뿌듯함과 동력이 되어 돌아오는 것이다. 나는 종종 나에게 본보기가 되는 동거인의 존재 자체가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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